원진재단은 원진레이온(주)에서 일했던 노동자들 사이에서 직업병이 집단적으로 발견됨에 따라 직업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1993년 11월 23일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입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정책으로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원진레이온은 일본과의 국교수립 협상과정에서 일본의 '동양레이온'이라는 회사의 설비를 인수받아 설립되었습니다.
일본의 설비는 이미 20년 이상 사용한 중고기계였기 때문에 기계노후화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계노후화는 노동자가 제조과정에서 유해물질에 취약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특히 레이온 제조 과정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 '이황화탄소'는 원진레이온 직업병의 주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황화탄소는 색깔과 냄새가 없고, 사람이 숨을 쉴 때나 손 등의 피부 접촉을 통해 남아있는 상태에서 호흡기와 입을 통해 인체로 유입됩니다.
이황화탄소에 중독되면 정신이상 증상을 보이거나 뇌경색, 다발성 신경염, 협심증, 관상동맥질환, 신부전증, 무정자증 등 아주 다양한 양상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만성중독자들은 흡사 그 질병 양상이 '중풍과' 비슷해서 원진레이온을 퇴직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중풍' 증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덧 원진레이온 공장을 '중풍공장'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문송면 사망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질병도 직업병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송면 사망사건은 1988년 당시 17살이던 문송면이 '협성계공'이라는 회사에 취직하여, 압력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작업을 한지 불과 한 달 만에 사망한 사건입니다. 문송면은 급성수은중독과 유기용제 중독으로 사망했고, 사회적으로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문송면 사건을 계기로 전 사회적으로 산업재해 실태의 심각성 및 산업재해 추방의 시급함을 촉구하게 되었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올림픽 성화 봉송로를 차단하고 자신들의 상태를 알리기 위한 투쟁을 계획하지만,
준비 과정이 경찰에 알려지게 됩니다. 정부는 노동자 대표를 불러 요구사항을 듣고 일정 부분을 수용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고 원진직업병 질병 유소견자에 대한 검진이 처음으로 실시되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초로 조직적인 직업병 인정투쟁이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35명의 노동자가 직업병 인정을 받았고, 다음해인 1989년에는 직업병 노동자들의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노동자 협의회"는 지속적인 인정투쟁을 진행하여 1990년 2월에 111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직업병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는 더 이상의 직업병 환자를 방치할 수 없고, 적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논리로 1993년 7월에 회사를 폐쇄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제3차 투쟁을 촉발시켰습니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비상대책위'로 변화시키고, 폐업철회를 요구하였으며, 회사가 폐업한 이후에도 명동성당에서 재야운동가와 일반 시민들의 지원을 받으며 무기한 농성 투쟁을 지속했습니다. 노사정 3자에 의한 지속적인 협의 결과, 회사의 폐쇄 후에도 보상기금의 관리와 지급을 실행하는 주체로서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을 설립하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원진직업병관리재단(약칭 원진재단)은 비영리 공익법인으로서 출자금 50억을 기반으로 같은 해 11월 28일에 설립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은 정부와 원진파산 관리주체였던 산업은행으로부터 합의한 병원설립기금을 바탕으로 직업병 노동자를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98년 당시 직업병 피해자들은 이미 800명이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원진재단은 임대 형식으로라도 병원 설립을 앞당겨야 한다고 판단하여, 구리시 인창동에서 운영하고 있던 '성림스포츠센터'의 지하공간과 1~2층, 6층의 공간을 임대하였습니다. 약 1년간의 준비 끝에 1999년 6월 5일 '원진녹색병원'이 개원하여, 9개과 50병상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구리시 인창동에 원진녹색병원이 개원하였으나 종합병원 건립의 필요성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 중에는 10년 이상의 세월동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황화탄소 중독증 자체가 완치가 어려운 이유로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선 특수건강검진이나 작업환경 측정 등 노동자의 입장과 상황에 맞게 진행할 수 있는 의료기관과 전문 인력, 시설, 장비 등이 필요하였고, 직업병 환자들의 재활치료를 꾸준히 받을 수 있는 환경도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은 원진녹색병원을 건립한 이후에도 종합병원 설립을 위한 부지 몰색 과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고, 인터넷을 통하여 '서울기독병원'의 경매 정보를 접하여 경매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서울기독병원'은 면목동 인근에 유일하게 자리잡고 있는 종합병원으로서, 구리시와 인근에 있는 등 여러 유리한 조건이 있었고, 11차례의 유찰상태에서 원진재단이 단독 응찰하여 2001년 9월에 법원의 최종 경매 승인을 받았습니다.
녹색병원 개원을 위하여 원진녹색병원을 만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준비위원회가 꾸려졌고, 녹색병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문 연구기관인 병원연구소에 용역을 의뢰하여, 중랑구 면목동이라는 위치에 따른 지역의 의료 수요를 평가하였고, 녹색병원의 구체적인 상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녹색병원은 지역에 뿌리를 두면서 공공성을 확립한 병원의 모습으로 그 틀을 갖추어 나갔습니다.
녹색병원은 기독병원으로 사용될 당시 500병상이었던 규모를 300병상으로 줄이는 대신 자연 채광과 환기가 가능하도록 만들고, 7층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재활센터를 140평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강당과 임원 사무실을 지하2층으로 내려보내는 파격적인 선택을 한 것에 반하여 환자들의 각 층마다 휴게공간 등을 두는 등 환자를 수용하는 곳이 아닌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배려를 하였습니다. 녹색병원의 개원은 약 2년간의 준비기간과 노력 끝에 2003년 9월 25일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