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0일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조영황 변호사)는 조정위원회를 신설하고 25명을 그 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조정위원은 인권침해, 차별, 성차별, 장애차별로 나뉘어 조정업무를 맡는다. 조정이란 판결 이외의 분쟁해결수단으로 당사자가 거부하지 않으면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비슷한 분쟁해결수단인 중재가 당사자들이 사전에 합의하면 구속력을 갖는 것에 비하면 조정은 사전합의가 없이 이해와 권익을 조절한다는 것이 다르다. 이 조정위원으로 당연히 판사 변호사 법대 교수 등 법조계 사람들이 17명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특수교육과 교수와 사회복지 전문가와 시민단체 활동가 여성학 학자가 각각 1명씩 있고 특이하게도 건축학과 교수가 1명, 그리고는 의대교수와 간호학과 교수가 1명 있고 필자가 들어있다. 특이하다고 말한 건축학과 교수와 특수교육과 교수와 필자는 전부 장애차별위원회에 들어있다. 장애와 인권, 그리고 차별과 조정이란 무슨 의미일까?
장애인과 장애가 사회의 관심사가 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그 전에도 장애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지만 장애인과 그 가족들만이 그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고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나 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드러내지 않았고 마치 그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없이 합의된 것처럼 숨기고 지내왔을 뿐이다. 그래서 장애인을 가진 가족은 엄청난 고통을 삭이고 견디어가고 장애인 자신은 적절한 교육과 훈련 없이 더 큰 장애에 빠지는 악순환이 거듭되어 왔다. 장애인도 없었고 장애인의 권리도 없었던 시대였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우리 사회 민주화의 분수령이 되어 체육관 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직접 국민이 뽑는 선거로 바꾸어 냈을 때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분야별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때 의사들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를 만들었고 90년에는 그 속에 장애인분과가 생겨 제일 먼저 한 일이 “장애인의 권리”라는 책을 번역해 출판한 것이다. 미국에서 1979년 발간된 이 책은 장애인 스스로 권리를 찾기 위해서 정부와 관리들과 싸워온 과정과 법에 규정된 권리를 쉽게 풀어 놓은 것이다. 장애인을 위해 뭔가를 하려한 의사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법률전문가들의 영역인 권리와 법에 관한 책을 번역하는 것이었다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현실은 아직도 바뀌지 않고 남아 있다.
바로 그때 울산에서 시각 장애인들이 전셋집을 구하고도 주민들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장애인의 생활이 지역주민들의 집단행동으로 거부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또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는 장애인들의 시위 소식도 끊임없이 신문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장애인의 권리는 비장애인들의 편견과 이해와의 힘겨운 싸움에서 사회의 따뜻한 개입이 필요하고 바로 그 일이 인권위원회가 새로 조정위원회를 만들어 하려고 하는 일이다.
권리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조정이라는 말은 낯설다. 그만큼 우리는 권리와 이해를 조절하는 나누는 사회적 훈련이 모자라다. 10년 전 장애와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흔히 쓰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듯이 얼마 뒤에는 조정이라는 용어도 성숙한 민주사회의 한 가지 필수과정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장애인의 고통과 어려움을 같이 나누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 양길승 녹색병원장
-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입학
- 아일랜드 국립 골웨이 의과대학 졸업
- 노동과 건강연구회 창립
- 인도주의 실천의사협의회 창립
- 원진노동자건강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