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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자료는 경향신문에 연재 되었던 <양길승의 세의보감>에 실린 내용입니다.
(게재일자 : 200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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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옆에 있는 아일랜드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저녁을 먹고 가로수 같이 무료로 나눠주는 지역신문을 보았더니 저녁 7시부터 한 초등학교에서 헌혈을 받는다는 광고가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헌혈을 어떻게 하나 호기심이 생겨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구경을 갔다. 그랬다가 평생 처음으로 헌혈을 하게 됐다.
그 초등학교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왔는데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2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헌혈을 할 수 있었다. 헌혈은 밤 12시가 되어서도 끝나지를 않았다.
그 도시의 이름은 골웨이,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의 정 반대쪽에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도시다. 인구는 4만명이라 하지만 도시 전체에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이 서너 곳에 지나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는 단 한 곳 밖에 없는 작은 도시다. 그런데도 헌혈을 받는 1주일 동안 내내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헌혈을 하는 사람들은 직장에서 퇴근한 사람들이고 헌혈을 받는 사람도 퇴근하고 나서 자원봉사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끌어당기고 사람들은 뿌리치고 피하는 모습이 익숙하게 그려지는 우리나라를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다. 군대에 가있는 젊은이들의 피로 겨우 수혈의 필요량을 채우는 조국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믿겨지지 않아서 더 작은 도시인 바리나스로우에 실습을 갔을 때 똑같은 광고를 읽고 갔었다가 두 번째 헌혈을 했다. 그곳의 인구는 1만명이 조금 넘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조그마한 동네다. 그래도 또 2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선물로 받은 연필 2자루를 딸아이에게 주면서 이 아이에게 남겨주어야 할 세상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헌혈이 없이는 사회가 존재할 수 없다. 살릴 수 있는 많은 사람을 죽게 버려두는 사회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스스로 여가시간을 내어 헌혈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야말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채우는 세상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다. 헌혈을 하는 것은 우리사회가 무엇에 의해 굴러가고 있는 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교육인 것이다.
헌혈을 하면 새로운 피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피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면 그 사회는 맑고 젊은 피가 도는 사회가 된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일의 시작은 시간을 내어 가족의 손을 잡고 헌혈하러 가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작성자 : 양길승 녹색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