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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자료는 경향신문에 연재 되었던 <양길승의 세의보감>에 실린 내용입니다.
(게재일자 : 200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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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7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창립 5주년 기념세미나가 있었다. 학술세미나라고 하였지만 꼭 학자들만 온 것은 아니고 의사협회와 병원협회가 참석하고 대학교수와 관련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참석했다.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료비 지불보상제도 개편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건의료환경 변화 가능성과 건강보험 발전방향이었다.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앞의 것은 직업이 의사이고 오랫동안 개업을 해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뒤 제목은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필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래서 의료개혁의 길이 멀기만 하구나”하는 절망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오고간 중요한 이야기를 묻어 버리기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어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첫 주제를 쉬운 말로 하면 의료비 계산 방법을 바꾸자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 내는 돈은 진찰비, 검사비, 수술 등 처치비, 입원했다면 입원비가 각각 값이 정해져 있고, 의료기관 종류에 따라 가산율이 있어 총 진료비가 계산된다. 그리고 의료기관마다 정해진 본인부담비율이 있어 그 비율대로 본인 부담액을 직접 낸다. 이런 제도는 우리가 지금까지 써 온 제도인데 ‘행위별 수가제’라고 한다. 모든 의료행위와 재료 등에 가격이 붙어 있어 사용한 만큼 비용을 주고받도록 되어 있어서 알기가 쉽다.
환자와 의료인이 모두 양심적이고 합리적이라면 이 제도가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검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입원을 오래 하면 할수록 즉 의료행위를 하면 할수록 의료비가 많이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당연히 의료인이 보다 많은 의료행위를 하면 의료비가 많이 나오고 따라서 보다 많은 수입을 얻게 되어있다. 양심적인 의료인이 적절한 검사나 치료를 하고 환자가 그대로 받아드린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떤 검사, 어떤 치료가 필요한가에 대한 정보와 판단은 전문가인 의료인가를 가지고 있는 쪽에서만 알고 있다. 환자는 적절한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또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고 있을 때 환자나 가족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적절한 수준이 아니라) 최선의 검사와 치료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의료행위에 가격이 붙어있는 행위별 수가제에서는 항상 과잉진료의 위험이 있다.
혹시 캐나다나 영국에 사는 교포가 검사를 하고 싶어도 받지 못한다고 불평을 하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은 의료보험의 종류가 다양하여 해 주는 서비스가 차등이 있지만 돈을 내면 환자가 원하는 검사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캐나다나 영국에서는 환자가 원해도 의사가 진찰해보고 그런 검사나 치료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면 해 주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의료행위에 따라 돈을 주는 것이 아니고 환자도 의료행위에 따라 돈을 내지 않는다. 주치의는 몇 명이 자신에게 등록되어 있는가에 따라 돈을 받고 환자는 세금을 낼 뿐 치료비는 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가 원하는 만큼 받지 못하여 환자는 과소진료나 의료결핍이라는 모자람을 느끼기 쉽다.
이렇듯 제도에 따라서 과잉진료와 과소진료의 경향성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현재 가벼운 질병에 대한 과잉진료와 중대한 질병에 대한 과소진료(?)라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감기 등 가벼운 질병에 의한 진료비 지출비율이 높아 의료재원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는가 하면 암 등 중대질병은 보험이 지원해 주는 비율이 너무 낮아 질병 치료를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가벼운 질병에서의 항생제 남용이나 주사제 과용 등 바람직하지 않은 의료행태가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저런 현상들이 모아져 종합적으로는 제대로 치료 받아야 할 사람들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의료자원이 낭비되고 파행적이고 기형적인 의료현실과 함께 의료비 지출이 늘어나고 있다. 치료중심의 의료보다 예방중심으로, 급성기 질환 치료에서 만성 질환의 관리 등 의료의 내용과 방향을 바꾸고 실질적인 의료보장이 되기 위해서는 의료비 지불 방식에 대한 논의가 이제는 시작되어야 한다.
의료제도가 바뀌려면 의료제도에 의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화담하여 방안이 제시되고 토론이 되어야 한다. 이해가 엇갈리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기 마련인 개혁은 그냥 당사자들의 손에 맡겨 두어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을 수 있지만 시민들이 충분히 설명을 듣고 자신의 판단을 가져야만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오는 개혁안이 진정한 개혁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민의 참여 없이 진정한 개혁은 이룰 수 없다. 시민들이 보다 쉽게 참여하고 함께 의논할 수 있는 공론의 장과 방식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작성자 : 양길승 녹색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