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이였고, 그동안 봐왔던 것은 앳된 청년 시절의 사진뿐이다. 그래서 그가 1948년생이고, 살아 있다면 이제 곧 팔순을 바라볼 나이라는 사실이 도통 믿기지 않는다. 1970년 11월13일의 세상과는 그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1970년만 해도 일하는 사람 중에서 농림수산업 종사자 비율이 50%에 달했다. 지금은 그 비중이 5%가 채 안 된다. 한국 사회는 빠르게 산업사회로 바뀌었다. 노동자 규모가 크게 늘어났을 뿐 아니라 1970년대 통계분류에는 없었던, 예컨대 ‘정보통신업’ ‘과학기술전문,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같은 산업군, 새로운 업무가 생겨났다.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제도도 달라졌다. 전태일 생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근로기준법을 통해 노동환경을 규제했지만,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있는지도, 정해진 법정근로시간이란 것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장시간 노동을 했다.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고 나서 잠시 가졌던 전태일의 희망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몸에 불을 붙여야 했던 절망으로 변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근로기준법이나 법정 노동시간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노동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제대로 안 지켜지고, 이마저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들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산재보험법은 사회보험 중 가장 먼저, 전태일이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러 나가야 했던 1963년에 제정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보호하기에는 너무 작은 울타리였다.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1970년, 농림어업, 보건의료와 사회복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직접 사업, 계약금 총액 2000만원 미만의 단일 건설공사, 상시 50인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장 등은 모두 산재보험 적용에서 제외되었다. 건강보험은 그가 죽고 난 이후인 1977년에야 시작되었다. 그나마 500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가 살아있었다고 해도 ‘의료보험증’은 한참 뒤에나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지난 50여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지고, 나아진 것이 실감난다. 이렇게 되기까지 전태일만이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땀과 투쟁, 때로는 생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것도 사실이다.
전태일은 환기가 안 되는 봉제공장에서 ‘타이밍’을 먹어가며 장시간 일하던 어린 여성 노동자가 폐병에 걸려 쫓겨나는 모습을 보고 분노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결핵을 진단받고 사업장에서 쫓겨난 이주노동자를 내가 만난 것은 불과 몇년 전이다. 직업소개소와 구인 전단은 사라졌지만, 하청과 불법파견은 사라지지 않았고, 화학물질 중독, 추락, 폭발화재, 그 어느 것이든 위험의 가장 앞줄에 이들 불안정 노동자들이 서 있는 현실은 그대로다. 그리고 물류센터의 컨베이어벨트, 스마트폰 화면의 ‘콜’은 1970년에 없던 방식으로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 산재보험은 여전히 멀고, 일 때문이든 아니든 아프고 다친 노동자가 병원비·생계 걱정 없이 치료와 재활을 받고 일터로 돌아가는 것도 여전히 어렵다. 그렇기에 동료 노동자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던 전태일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고 필요하다.
‘노동자병원’을 전면에 내세운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거액의 기부금을 낸 재벌 총수나 기업 이름을 붙인 공적 건축물과 시설은 이미 익숙하다. 서울대학교 암연구소의 이건희홀, 한양대 정몽구 미래자동차연구센터, 고려대 경영대의 이명박 라운지, 성공회대 승연관 등등. 노동자, 다른 누구도 아닌 전태일의 이름을 기리는 병원을 이제야 갖게 된다니, 사실 너무 늦었다. 전태일에게 빚진, 일하는 사람들이 작은 손길을 보탤 차례다.
▲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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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태일에게 진 빚 갚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