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레를 끄는 전태일
- 전태일의료센터의 개원을 기다리며
김훈(소설가)
녹색병원(원장 임상혁.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운영하고 있는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사장 양길승. 이하 원진재단)은 손수레로 폐지를 수집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노인들(60~80대)을 위해 새로운 손수레 모델을 개발해서 1차 시제품을 제작 중이다. 이 시제품은 2025년 초에 현장의 노인들에게 지급되고 설계 도면은 전국의 유관기관들과 공유된다.
원진재단 부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인간공학팀(팀장 허승무)이 개발한 이 신형 손수레는 종래의 손수레보다 훨씬 가볍고 안전하고 힘이 덜 든다. 인간공학팀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인들의 작업상의 특성을 조사 분석해서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위험도를 낮출 수 있는 손수레를 고안했다. 녹색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폐지 수집 노인들의 임상 기록이 새로운 손수레 설계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인간공학팀의 현장 조사에 따르면, 폐지 수집 노인의 노동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대목은 바닥에 놓은 폐지를 주워서 손수레로 옮겨 쌓는 과정의 불안정한 자세이다. 이 동작을 할 때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는 동작을 반복하고 힘을 무리하게 사용하게 된다. 실지로 폐지 줍는 노인들은 허리, 어깨, 팔꿈치, 손목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인간공학팀은 이러한 위험성과 손수레 자체의 무게를 줄이는 방안을 설계에 반영했고, 시제품 손수레를 보급한 후에도 계속해서 작업 현장을 관찰해서 미비점을 보완해 나갈 계획이다. 허승무 팀장은 "여러 유관기관에서 이 설계도와 모델을 적극 활용해 주기 바란다. 선한 영향력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허승무 팀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눈앞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가난, 위험, 부상, 질병이 상승효과로 증폭되고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면, 우선 가능한 일을 찾아내서 실천하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로구나…
이 같은 단순성의 힘을 나는 겨우 알게 되었다. 금년 여름은 끔찍하게 더웠다. 겨울은 몹시 추울 거라는 예고가 나와 있다. 덥거나 추운 날에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도심지의 차로를 지나가거나 산동네의 비탈길을 올라가는 노인의 모습을 TV 화면이나 신문에서 자주 보았고 그때, 나는 슬픔과 연민으로 마음이 아팠지만, 손수레의 문제를 손수레 안에서 풀어보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고통스러운 화면에서 슬픔과 연민을 느끼는 내 마음의 작동을 스스로 선(善)하다고 여기면서 만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마도 다른 많은 사람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손수레는 인간의 몸의 구조와 작동 방식, 노동 과정의 조건과 거기에 따르는 위험, 한 번에 사용하는 힘의 크기와 그 동작이 반복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도를 한 계통의 생각에 연결시키고, 그 해결책을 손수레의 물리적 구조와 인간의 신체 구조 속에서 모색한 것이다.
이것은 사물을 향해서 직접 달려들어서 그 핵심부로 들어가는 직입(直入)이다. 직입은 상상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고 언설이 아니다. 직입은 인간과 손수레를 바로 연결시키는 정신의 작용이고 물리적 실천이다.
사실, 직입(直入)이라는 단어는 내가 옛 조사(祖師)들에게서 주워듣고 써먹는 말이다. 나는 이 두 글자를 무척 좋아해서, 자주 써먹으려는 충동을 억제하고 있다. 나는 글자에 갇히고 걸려서 넘어졌다. 나는 말을 껴안고 나뒹굴면서 사물과 인간의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것은 말을 다루는 자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병리적 징후인데, 이 병증은 유습되고 감염된다. 손수레를 놓고 이처럼 여러 말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고 있는 것도 이 병리 현상일 테지만, 내 마음을 남에게 전하자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그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는다.
허승무 팀장의 새 손수레를 생각하면서 나는 말 많고 길 없는 이 세상에서 작지만 선명한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직입'은 인간과 사물에 직접 마주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받아들임으로써 들어가는 일이다.
2023년 3월 20일 나는 송경용 신부님(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을 따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을 방문했다. 그날 간단한 행사가 끝나고 나서 나는 「원진직업병 투쟁의 전개과정」(박석운 원진재단 상임이사 지음, 원진재단·녹색병원 발행)이라는 소책자를 얻어왔다. 이 책은 사망자 245명, 피해자 950명이 발생한 원진 직업병 참사(이황화탄소 중독)와 그 후 30여 년에 걸친 투쟁의 결과로 원진재단과 녹색병원이 건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보고서이다. 원진 직업병사례는 1981년에 최초로 인정되었고, 「한겨레」의 최초 보도(1988년 7월 22일)로 사회적 관심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이 소책자는 산업재해로 고통 속에서 죽은 노동자의 죽음에 산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개입시켜서 더 많은 죽음을 막아내고 제도를 개선하고 피해를 보상받고 권리를 쟁취한 항쟁의 기록이다. 이것은 타인의 죽음을 타자화하지 않음으로써 삶의 길을 찾아가는 마음의 작용이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 낸 험난한 과정이다.
불가(佛家)의 옛 스승들은 자성(自性)에 직입함으로 자유에 도달한다고 가르쳤는데, 나는 그 말에 홀릴 뿐 거기에 닿지는 못하지만, 허승무 팀장의 손수레를 볼 때 인간과 사물에 직접 닿는 한줄기 선명한 길을 느낀다.
전태일은 분신을 결행하기 6개월 전인 1970년 3월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무엇을… 제품계통에서 일하는 근로자를 위해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는 일
누구와… 제품계통에 종사하는 어떤 기능공들과
언제… 1970년 음력 6월달 이전에
어디서… 서울 평화시장에서
(조영래 지음 「전태일 평전」 247쪽 2009. 전태일재단)
이 단순하고 선명한 몇 줄의 문장이 '전태일 사상'의 핵심부를 표현하고 있다. 전태일은 지금 이 자리에서, 현실과 미래 속으로 그리고 어린 기능공들 속으로 직입(直入)하고 있다. 현실로 뛰어드는 것만이 현실을 개조하는 길이다. 이 일기를 쓰고 나서 6개월 후에 그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직입했다. "배가 고프다"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같은 책 376쪽)
원진재단은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 주차장 자리에 지하 3층 지상 6층 규모의 「전태일의료센터」를 신축 건립한다. 이 병원의 사명은 일터에서 다치고 병든 노동자들을 '제때 제대로' 치료하는 것이다.
1979년 YH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경찰의 폭력진압은 박정희 유신정권 몰락의 서막이었다. 이제 전태일의료센터가 들어서게 되는 부지는 옛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기숙사 터이다. 이 자리에 전태일의료센터가 세워지고 또 그 자리에서 허승무 팀장의 새 손수레가 발생하고 있다.
이 인연을 생각하면, 다치고 병든 노동자들을 태운 손수레를 끌고 길 없는 세상에 길을 내며 걸어가는 전태일의 환영이 내 마음에 떠 오른다.
「전태일의료센터」는 2027년 하반기에 완공될 예정이다.
※ 녹색병원은 전태일의료센터 건립비용 190억 원 중 50억 원을 국민의 참여와 헌금으로 충당할 계획을 시민사회에 제안해 놓고 있다.
2024-11-10 씀
김훈(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