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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987년 6월10일 그날 그곳에 있었던 이종훈, 어머니 김정자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12-06-13 10:20:06
  • 조회수 9024
[경향신문]

1987년 6월10일 그날 그곳에 있었던 이종훈, 어머니 김정자


1987년 봄 어머니는 몇 번이고 아들이 있는 구치소를 찾아 나섰다. 서울 성동구치소, 경북 청송구치소, 전남 장흥구치소….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호헌조치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민주화 열망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왔다가 이내 잡혀가곤 했다. 

어머니들은 꼭 ‘캔 음료’를 들고 면회를 갔다. 면회는 안됐지만 구치소 밖에서 캔으로 바닥을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고 젊은이들은 ‘우리 어머니가 오셨구나’ 하며 힘을 얻었다고 한다. 


최루탄 맞고 쓰러진 이한열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함께 시위하던 이종창씨가 부축해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장면은 정태원 전 로이터통신 특파원이 찍었다.
올해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아들과 어머니는 다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아 ‘6월항쟁’을 노래한다. 6월항쟁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종훈씨(46)와 그의 어머니 김정자씨(71)는 10일 서울광장에서 선보일 ‘시민합창단’ 공연에 자원했다.

지난 7일 이씨와 어머니 김씨를 만났다. 이들은 “벌써 25년 전 이야기”라면서도 그때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씨는 “그해 5월23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전두환 정권은 이미 끝났다는 분위기였고 잡혀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서울 종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고 했다. 그는 “이전까지만 해도 경찰이 오면 시위하다 도망가고 그랬지만 그때는 두려운 게 없었다”며 “경찰서 들어가서도 잘못했다고 하지 않아 혼자 구속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대학 2학년이라 앞장서 시위를 이끌지는 않았지만 민주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이씨 가족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한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새벽이면 모르는 사람들이 담을 넘어와 이씨의 소재를 묻곤 했다. 김씨는 “경찰이나 정보기관 사람들이 이웃들에게도 우리집 소식을 묻고 가는 걸 보고 처음엔 무서웠다”며 “막상 시위에 나가 보니까 내 아들이 자기 이익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다른 어머니들과 함께 대학에 먹을 것을 배달하거나 구치소 뒷바라지를 했다. 김씨는 거리시위에도 자주 나갔다. 남편은 “호적에서 빼버리겠다”며 아들의 시위를 말렸다. 김씨가 “애들이 옳다”며 쫓아다니자 어느 때부턴가 남편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이씨는 6월항쟁이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지만 많은 부분이 아쉬웠다고 했다. 그는 “군사정권을 바꾸고 국민주권을 실현해야 한다는 열망이 모인 정점이 직선제였다”며 “그런데 막상 직선제는 됐는데 민주화 세력이 분열하고, 권력이양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패배의식 같은 게 남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 모자(母子)는 직선제 이후 6번째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올해까지도 6월항쟁의 과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이씨는 “이전 정권도 최선은 아니었지만 현 정부 들어 많이 망가졌다”며 “말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고 했다.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시민합창단’ 공연에 함께 참가하는 김정자(왼쪽)·이종훈씨 모자가 7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6월항쟁의 기억을 얘기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씨는 현재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원무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녹색병원에는 직업병 환자나 서민들이 주로 찾는다”며 “최근 몇 년간 이들을 지탱해주는 사회안전망이 해체됐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이 낮은 환자들이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체계가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씨는 “새 국회에 6월항쟁에 참여했던 386세대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며 “25년 전에는 독재에만 저항하면 됐지만 지금은 기대하고 바라는 국민들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부자들에게만 세금 혜택이 돌아가고, 저축은행 사건에서 보듯 서민생활이 점차 힘들어지면서 희망이 사라져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또 “새 국회, 새 정권에선 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시민합창단에서 김씨와 이씨는 각각 소프라노와 베이스 파트를 맡았다. 

김씨는 “자식 덕에 내가 사회에 눈을 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한다”며 “그때로 돌아가도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합창단에 들어가 그 시절 노래들을 부르니 가슴 뭉클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날이 오면’을 다시 부른다. 당시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상황이 된 건 아쉽다”고 했다. 그는 “최소한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가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시민들은 다시 분노하고 거리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향미·김한솔 기자 sokhm@kyunghyang.com>
자료출처_http://news.khan.co.kr/kh_news/art_print.html?artid=20120608220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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